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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음창제의 비밀을 찾아서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66





우리말의 뿌리는 아주 깊다.정음이 나오기 앞서는

이두나 구결에 의해 한문으로 기록을 남기고,정음이

나오고나서 차츰 우리말의 깊은 뿌리가 살아나는

표기가 자유스러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만 않은 듯싶다.왜냐하면

우리네 문짜생활이 정음반포에 불구하고 한문과

이두로부터 벗어나 입말을 세상을 맞이하지 못한

세월이 무려 사 오백년이나 넘게 걸렸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정음도 언문이라 불리며,한문의 언해와

절간의 독경이나,광대의 소리와 구전소설같은

이야기꺼리나 담는 입말이 아닌 글말이기는 한문

이두와 마찬가지이었다.정음이 한글로 불리기까지

세월을 기달려서 아주 나중에야 어문일치의 입말이

나오기에 이른다.



정음이 우리말로써의 주인된 자리에 오른 것은 서세

동점의 물결 가운데 서학의 교과서로 성경의 번역이

널리 퍼진 이후이다.왜에 주권을 내주고도 한문은

진짜[眞書]이고,언문이 가짜[개글]로 업신여김을

당하는 가운데 나온 언문성경이 왜어의 영향을 받아

우리말의 어문일치의 세계를 이끈 것이리라.



따라서 한문과 이두에 눌려서 기도 펴지 못한 우리네

정음[한글]이 무려 5백여년 전에 갑짜기 창제되었

다는 정음창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없지 않다.

우선 정음이 반포된 때가 문제이다.고려라는 나라를
선양하여 새나라를 세운지 반세기도 안된 조선이야
말로 감시가 심한 중국과 많은 외교적인 갈등을 겪는
시기라 최만리의 주장대로 시의에 맞지 않은 조치인
셈이다.



게다가 정음이 고전[字形而古篆]을 닮았다 하여,

다른 글짜를 본뜬 것이라 하는데,고전(동방속용)이
라는 것이17세기까지는 남아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 형태를 알 수 없을 뿐더러,정음반포를 반대하는
주장에 미리 고전이나 정음을 탓하지 않고, 진짜[眞書]가
아닌 가짜[諺文] 타령이 불거진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다.
(한마디로 임금이 훈민정음으로 부르는 글짜를 새로 반포
하는데 정음을 탓하는 게 아니라 어찌 언문이라는 망언을
입에 담을 수 있으며,임금도 그자를 당장 능지처참의 벌을
주지 않고 살려 두는 수가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세종임금이 정음청을 두어 왕세자를 비롯한
학자들에게 짧은 기간 동안에 정음을 연구하게 한 것만
보아도 틀림없이 세종이 나름대로 언문(동방속용)에 밝아
음운의 이치를 따른 맞춤법이 서는 언문의 경우를 밝혀
시험하는데 걸린 시간이리니,이때에 나온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같은 언문책자들이 바로 새로운
맞춤법의 본보기나 시험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 세종은 시국이 어수선한 시절을 구중궁궐에서,사가에
나와서도 우리말과 글을 탐구하는 생활에 묻히어 자신의
안위를 지켜낸 그릇이었기에 훈민정음이라는 문짜통일의
세계를 내놓았으리라는 역설이 설 수 있다.)



그러므로 세종임금의 정음반포는 에스페란토처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한문과 이두에 눌려 절간은
절간대로 구중궁궐이나 규방은 규방대로 저마다 다른 표기
로 표준이 없던 언문을 통일규범에 따라 당시의 학문으로
글짜의 그릇이 어떻게 짜여지고 또 글짜끼리 서로 조합하는
방식이 어떻게 서야하는지를 밝혀 훈민정음이라 반포한
문짜혁명을 꿈꾼 것이리라.



세종의 이 마음은 아주 나중에 서학의 교과서 성경이
길을 터주기까지 태생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문짜혁명이
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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