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정음이 반포된 때가 문제이다.고려라는 나라를
선양하여 새나라를 세운지 반세기도 안된 조선이야
말로 감시가 심한 중국과 많은 외교적인 갈등을 겪는
시기라 최만리의 주장대로 시의에 맞지 않은 조치인
셈이다.
게다가 정음이 고전[字形而古篆]을 닮았다 하여,
다른 글짜를 본뜬 것이라 하는데,고전(동방속용)이
라는 것이17세기까지는 남아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 형태를 알 수 없을 뿐더러,정음반포를 반대하는
주장에 미리 고전이나 정음을 탓하지 않고, 진짜[眞書]가
아닌 가짜[諺文] 타령이 불거진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다.
(한마디로 임금이 훈민정음으로 부르는 글짜를 새로 반포
하는데 정음을 탓하는 게 아니라 어찌 언문이라는 망언을
입에 담을 수 있으며,임금도 그자를 당장 능지처참의 벌을
주지 않고 살려 두는 수가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세종임금이 정음청을 두어 왕세자를 비롯한
학자들에게 짧은 기간 동안에 정음을 연구하게 한 것만
보아도 틀림없이 세종이 나름대로 언문(동방속용)에 밝아
음운의 이치를 따른 맞춤법이 서는 언문의 경우를 밝혀
시험하는데 걸린 시간이리니,이때에 나온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같은 언문책자들이 바로 새로운
맞춤법의 본보기나 시험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 세종은 시국이 어수선한 시절을 구중궁궐에서,사가에
나와서도 우리말과 글을 탐구하는 생활에 묻히어 자신의
안위를 지켜낸 그릇이었기에 훈민정음이라는 문짜통일의
세계를 내놓았으리라는 역설이 설 수 있다.)
그러므로 세종임금의 정음반포는 에스페란토처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한문과 이두에 눌려 절간은
절간대로 구중궁궐이나 규방은 규방대로 저마다 다른 표기
로 표준이 없던 언문을 통일규범에 따라 당시의 학문으로
글짜의 그릇이 어떻게 짜여지고 또 글짜끼리 서로 조합하는
방식이 어떻게 서야하는지를 밝혀 훈민정음이라 반포한
문짜혁명을 꿈꾼 것이리라.
세종의 이 마음은 아주 나중에 서학의 교과서 성경이
길을 터주기까지 태생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문짜혁명이
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