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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任那)가 김해(金海)인가 대마도(對馬島)인가 하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일제(日帝)나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者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 의하면 “임나(任那)는 시라기(新羅)에 의하여 흠명(欽明)23(562)에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기록을 우리나라에서 있었든 사건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임나(任那) 김해(金海)에 있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임나(任那)가 대마도(對馬島)에 있었다고 하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는 모든 사건들은 일본에서 있었든 사건들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또 임나(任那)를 대마도(對馬島)라고 하면 대마도(對馬島)가 신라(新羅)에 의하여 합병되어버렸으므로 대마도(對馬島)가 신라(新羅)때부터 우리나라의 영토라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일제(日帝)는 임나(任那)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893년에는 관정우(管政友|칸마사도모)라는 자가 임나(任那)를 김해(金海)로 간주하고 임나가 일본에 조공한 기록들을 모아서 임나고(任那考)라는 책을 편찬했으며.
1894-1896년에는 나가통세(那珂通世|나카미찌요)가 가라제국(加羅諸國)은 임나제국(任那諸國)과 같은 것이라는 내용으로 가라고(加羅考)라는 것을 발표하였는데 이 것들은 [임나(任那)는 가라(加羅,韓)하고 같은 것이고 가라(加羅,韓)는 가야(伽倻)하고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가라쿠니(韓國)]라고 한다고 주장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일제(日帝)가 우리나라를 한국(韓國)으로 호칭하기 시작한 것은 1870년 왜인(倭人)사이코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한 것이 처음이었으나 별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위의 주장은 사이코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주장한 한국(韓國)이 우리나라라고 한 것을 보완하기 위한 주장이라 할 것입니다.
이후에 우리나라와 체결한 모든 조약문서에 우리나라를 한국(韓國)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 1894년에 7월23일 한.일잠정조약(韓日暫定條約)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1, 日本政府는 韓國政府의 內政改革을 希望하고 韓國政府는 其 急務임을 認定하여 其 勸告에 좇아 勵行할 것을 保證함] 이라고 하여 한국(韓國)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內政改革의 種目中 京釜, 京仁間鐵道修築事業은 韓國政府의 財政狀態를 考慮하여 日本政府또는 日本의 一會社와 締結하여 適切한 時期에 起工을 希望함.
3. 4.조 생략]라고 이 때부터 우리나라를 한국(韓國)으로 호칭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六百年史 - 에는 한국잠정합동조관(韓國暫定合同條款)을 소개하고 있는데
[ 一. 이 철도 약정은 일방은 조선 정부 타(他)의 일방은 일본 정부 또는 일본 정부가 소개한 회사간에 이를 정결(訂結)한다.
二. 이 관약(款約)에 실린 철도 건축은 원래 조선 정부의 사업에 속한다 하겠으나 그 공사 및 비용은 총(總)히 일본 정부 또는 회사에서 이를 상당(相當)하고 우부지(右敷地) 매상(買上)할 것도 조선 정부에서 법을 설(設)하고 일본 정부 또는 회사로부터 이 대상(代償)을 지불한다. 이하 생략]
여기 두 종류의 조약 문 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를 호칭하는 명칭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관의 제목에는 한국(韓國)이라고 되어있는데 조문에는 조선(朝鮮)이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韓國)을 조선(朝鮮)으로 변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국호는 조선(朝鮮)이었으므로 “한국(韓國)은 대한 국(大韓 國)이나 대한민국(大韓民國)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명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무엇 때문에 명칭을 변조했을까 ?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말을 한국어(韓國語)라고 하고 우리의 역사를 한국사(韓國史)라고 한者들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제(日帝)는 한국(韓國)이라는 명칭을 제3국과 체결한 조약에서 사용하여 이 나라들에게 우리나라를 한국(韓國)으로 인식토록 하였는데 제2회 영일동맹(英日同盟)의 전문에는 [日本은 한국(韓國)에서 최고(最高)의 정치적군사적(政治的軍事的) 및 경제적권리(經濟的權利)를 有함에 의하여 영국(英國)은 각국(各國)의 상업(商業) 및 공업(工業)의 기회균등원칙(機會均等原則)에 反하지 않는限 일본(日本)이 필요(必要)타고 인정(認定)하는 지도(指導) 지배(支配) 및 보호(保護)의 수단(手段)을 한국(韓國)에 실시(實施)할 일본(日本)의 권리(權利)를 인정(認定)한다.]라고 하여 제3국에도 우리나라를 한국(韓國)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조약을 체결한 후 11월 17일에는 한일보호조약(韓日保護條約)을 체결하였습니다.
이처럼 일제(日帝)는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역사를 변조까지 하면서 우리나라를 한국(韓國)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 2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물러갔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한국(韓國)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우리나라를 한국(韓國)으로 호칭하여 체결한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하고 책임을 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도리어 한국(韓國)이라는 명칭을 우리나라의 국호인 대한(大韓)과 연관시키기 위하여 많은 기록들을 변조했으며 이들의 주장에 반하는 증거를 제시할 경우 생계를 연명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제(日帝)와 함께 우리역사를 왜곡한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든 것은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을 섰던 者들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문교부 장관(文敎部長官) 과 인문학계(人文學界)의 요직을 독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者들은 모든 조약에 기록되어있는 “한국(韓國)이라는 명칭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변조해서 소개하기도 하고 어떤 국문학자라고 하는 者는 자신의 손자의 이름을 한국(韓國)으로 사용토록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일제(日帝)와 그들을 추종하는 者들은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전력을 다한 것입니다.
1913년에는 금서용(今西龍|이마니시류)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는 가라(加羅)나 임나(任那)에 관련되는 지명들을 우리나라의 지명으로 비징(比定)하여서 가라강역고(加羅彊域考)라는 것을 편찬하였는데 특히 이者은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을 하면서 1917년부터 우리나라 한강이남 일대의 가야(伽倻)의 고지(故地)를 답사하면서 고분(古墳)을 발굴하여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였는데 이것은 일본과 관련이 될 수 있는 유물을 찾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일본과 관련이 있는 유물은 찾지 못한 者입니다.
또 1913년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쓰다소우기찌)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속령(屬領)을 가졌을 때 그 통치기관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였는데 임나(任那)는 일본부의 소재지였고 가라국(加羅國)의 별명이라고 하는 내용으로 임나강역고(任那彊域考)를 편찬하였는데 특이 한 것은 이 者은 1942년 일본서기의 내용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는 이유로 비공개 법정에서 금고3개월 진행유예2년의 판결을 받기도 한 者인데 이 판결문에는 “신무천황(神武天皇)으로부터 중애천황(仲哀天皇)에 이르는 역대 천황의 존재에 대하여 의혹을 품게 할 우려가 있는 강걸(講說)을 감히 함으로써 천황의 존엄을 모독하는 문서서 저작하고......”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者은 일본서기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고 있었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제는 일본서기에서 소재지를 알 수 있는 부분에 있는 한국(韓國)을 공국(空國)으로 변조하였으나 소재지를 알 수 없는 한국(韓國)은 그대로 두고 우리나라라고 했습니다.
일제(日帝)는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서 일본서기를 왜곡하였는데 이들과 같이 왜곡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출신들과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者들은 가야사(伽倻史)를 복원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서기를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서기에는 시라기(新羅)와 구다라(百濟) 그리고 고마(高麗)를 전쟁한번으로 모두 굴복시키고 번국(蕃國|속국)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일본인 사학자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쓰다소우기찌)도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 기록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중애(仲哀) 9(200)년
令諸國集船舶練兵甲 時軍卒難集 모든 나라에 명령을 내려 선박을 모으고 전쟁준비에 들어갔는데 군졸을 모으는 것이 어려웠다, 皇后曰 必神心焉 황후가 말하기를 반드시 신의 마음일 것이다, 라고 했다, 則立大三輪社 以奉刀矛矣 軍衆自聚 곧 삼륜사를 세우고 군의 무리가 스스로 창과 칼을 모아서 바쳤다, 於是使吾瓮海人烏摩呂 出於西海令察有國耶 還曰國不見也 그래서 어부 오마려를 서해로 보내 나라가 있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그런데 돌아와서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又遺 磯鹿海人名草而令 視數日還之曰 西北有山 帶雲橫? 다시 기녹의 어부 초라고 하는 자를 살펴보게 했는데 수일 후 돌아와서 서북방에 산이 있고 그 위에 구름이 가로 놓여있습니다, 蓋有國乎 나라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爰卜吉日而臨發有日時 皇后親執斧鉞 令三軍曰,,,,,,,,, 그래서 점을 처서 좋은 날을 잡아 출발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황후는 스스로 부 월을 가지고 삼군에게 명하여 ............
■ 이 기록은 시라기(新羅)를 정벌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인데 시라기(新羅)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어부를 바다에 나가서 찾으라고 해서 나라를 찾았는데 그 나라가 시라기(新羅)라고 간주하고 출전 준비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기록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기록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8회분에서 소개한 것처럼 일본서기에는 ”수인(垂仁)2(bc28)년 기사에는 시라기(新羅)가 일본이 임나(任那)에게 하사한 물품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고 3(27)년에는 시라기(新羅)의 왕자가 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이 시라기(新羅)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찾아다녔다는 것은 황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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