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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韓國)이라는 명칭의 내역(來歷) 8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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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이 기록을 [任那國遺 蘇那葛叱知 令朝貢也 任那者 去筑紫國 二千餘里北阻海以 在鷄林之西南 | 임나국이 “소나가시치”를 보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000여리 가야하는데 북쪽은 험한 바다로 막혀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잘못된 부분이 있어 바로 잡습니다.
■ 여기서 “北阻海以를 북쪽은 험한 바다로 막혀있다 ” 라고 한 것을 북쪽에 조해 가있다 라고 바로 잡습니다.
신공(神功)5(205)의 기록에 “共到大馬宿于阻海水門 | 함께 대마도에 도착하여 조해의 수문에 숙박하였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조해(阻海)는 험한 바다라는 의미가 아니고 대마도(對馬島)에 있는 포구(浦口)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임나(任那)는 우리나라의 김해(金海)가 아니고 대마도(對馬島)임을 확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한국(韓國)을 공국(空國)으로 변조하고 우리나라를 한국(韓國)이라고 한 것과 같은 방법인 것입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경행(景行)12(82)년 12월 가사에는[ 議討熊襲 於是天皇詔群卿曰 朕聞之襲國有厚鹿文?鹿文者 是兩人熊襲之渠帥者也 | 웅습(구마소)를 토벌할 것을 토의하는데 천황이 여러 경에게 말하기를 나는 습국(소노구니)에 후녹문(아쓰가야) 책녹문(사가야)라는 자가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웅습의 악자의 거수(지도자|이사호)로서 衆類甚多 是謂熊襲八十梟帥 其鋒不可當焉 小與帥則不堪滅賊多動兵 是百姓之害 可不假鋒刀之威 坐平其國|

도당이 대단히 많은데 이를 웅습의 80효수(야소다게루) 라 한다. 그의 기세가 성하여 대적할 자가 없다. 군 세가 적어서는 적을 격 멸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많은 병을 동원하면 백성에 해가 된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병사의 위력을 빌리지 않고 그 나라를 평정할 수 없을까 하고 말하였다 時有一臣進曰 熊襲梟帥有二女 兄曰市乾鹿文(乾此云賦)弟曰市鹿文 容貌端正 心且熊武 宜示重幣 以?納麾下 | 그때 한사람의 신하가 앞으로 나와서 웅습효수(구마소다게루)에게는 두명의 딸이 있습니다. 언니를 시건녹문(이치후가야|건(乾)이것을 부(賦)라 한다.)라고 하고 동생을 시녹문(이치가야)라고 합니다.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 또한 무웅합니다. 많은 선물을 주어서 천황의 휘하에 부르십시오..... ]

이 기록에 의하면 습국(襲國)에는 두 사람의 거수(渠帥)가 있으며 그의 휘하(麾下)에 80명의 효수(梟帥|용감한 장수)가 있는데 웅습(熊襲)에는 효수(梟帥)가 다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습국(襲國)에는 지도자를 거수(渠帥)라고 하고 있는데 이러한 명칭은 삼국지(三國志)의 삼한(三韓)에는 우두머리를 거수(渠帥)라고 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일본서기에는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왕을 괴수(魁帥)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에서만은 거수(渠帥)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웅습(熊襲)은 한국(韓國)을 공국(空國)으로 변조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나라인 것입니다. 때문에 습국(襲國)이라고 하는 것은 삼한(三韓)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록에는 경행천황웅습정토경로도(景行天皇熊襲征討經路?)라고 하는 지도가 첨부되어있습니다. 습국(襲國)의 범위는 장기(長崎|나가사키) 좌하(佐賀|사가) 복강(福岡|후쿠오카)일부 및 웅본(熊本|구마모도) 녹아도(鹿兒島|가고시마) 궁기(宮崎|밍자키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로 규수(九州)의 가장서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이곳에서 일본의 근거지로 생각되는 축자(筑紫)를 지칭하는 경우에는 동쪽운운 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특히 이 지도에는 정벌했다는 웅습(熊襲)의 위치는 물론 습국(襲國)의 범위 안에는 어떠한 지명도 표시되어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곳에 있는 지명은 모두 우리나라에 있는 지명이라고 하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특히 이 지역에는 가라쿠니다케(韓國岳)라고 하는 산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한국(韓國) 동한(東韓) 하한(下韓) 남한(南韓 )등의 나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가야산(伽倻山)의 줄기에 있는 산들을 중심으로 6가야(伽倻)가 있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제의 학자라는 者들과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者들은 일본서기에 기록 되어있는 가라쿠니(からくに|韓國 또는 加羅國)나 가라(から| 韓또는 加羅)가 우리나라에 있었든 가야국(伽倻國)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라산(韓國岳)은 일본규수에 있어도 가라국(からくに|韓國)이나 가라 (から|韓)는 우리나라에 있었다고 억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이 “가라 국”들이 우리나라 어디쯤 에 있었는지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김해(金海)를 가라(から| 韓또는 加羅)라고 지목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해는 이들의 주장대로 하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는 임나(任那), 미나미가라(みなみから|南韓또는 南加羅) 하고 삼국지 왜인 전에 기록되어있는 구사한국(狗邪韓國)과 같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김해는 이처럼 세나라가 같이 있을 만큼 넓은 지역이 아니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는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廣開土境好太王隆功聖德卓越百王 四海之內咸稱烈帝 年十八登極又光明殿..........광개토경 호태왕은 융성 공덕 하여 여러 왕들 중에 탁월하여 사해 안에서는 모두 열제라 칭하였다.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였는데 .......自渡海 所至擊破倭人 倭人百濟之介也 百濟船與倭密通 使之聯侵新羅之境 帝躬率水軍....바다를 건너가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였는데 왜인은 백제의 갑옷 같은 것이었다. 백제가 왜와 밀통 하여 신라의 경계를 침범하여 사신을 보내왔다. 호태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皆平服 任那伊倭之屬 莫不稱臣 海東之盛於斯爲最矣 .......모두 평정하여 굴복시켰다. 임나외 이는 왜의 무리들은 신하로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번성함은 이때가 최 전성기였다. 後倂于任那 聯政以治 三國在海七國在陸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하여 다스렸는데 세나라는 바다에 있고 일곱 나라는 육지에 있었다. 初弁辰狗斯國人先在團聚 是爲狗邪韓國 多婆羅 稱多婆羅韓國 처음 변진구사(야)국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를 구사(야)한국이라 하고 다파라를 다파라 한국이라고 한다. 自忽本而來與來高句麗旱己定親 故常爲烈帝所制 多羅國與安羅國同隣同而姓 舊有熊襲城 今九州熊本城是也 홀본 으로부터와서 고구려와 친교를 맺고 있었으므로 항상 열제의 통제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이웃하며 성이 같았다. 옛날에 웅습(구마소)성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 규수의 웅본(구마모도)성이 그것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일제(日帝)의 역사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者들에의하여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과 함께 외면을 당하였는데 이유는 언제 편찬되었는지 와 편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색한 이유일 뿐 한국(韓國)이 일본의 규수(九州)에 있다고 되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日帝)의 사학자들이나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者들은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편찬과정이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일본서기를 720년에 썼다 라고 하고 있으나 이것은 신빙성이 결여되어있는 주장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일본을 국호로 사용한 것은 7세기후반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문무왕(文武王) 10년 12월 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으며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 以爲名 | 왜 국은 나라이름을 일본이라고 고쳤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해뜨는 곳에 가까우므로 이렇게 이름한다” 라고 하였다.
또 구당서(舊唐書) 동이전(東夷傳) 일본조(日本條)에는 [日本國者 倭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故爲名 或曰倭國 自惡其名不雅故改爲日本| 일본은 왜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태양과 가까운 곳에 있어 일본이라 했다. 혹은 왜국 이라고도 하는데 스스로 그 이름이 추하고 우아하지 못해서 일본으로 고쳤다고 한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어떤 연유로 누가 편찬을 했는지에 관련된 것들은 알려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720년에 편찬하였다고 하는 것은 “왜를 일본으로 국명을 변경한 것을 계기로 편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서기에는 “구본에는 이렇게 되어있다”라는 곳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서기를 다시 썼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언제 다시 썼는지에 관하여 아무런 설명이 없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변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를 변조한 시기는 19세기 후반으로 생각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일본서기 [ 천지천황(天智天皇)8(669)년 에 災近江宮從 大藏省第二創出| 근강궁(아후미노미야)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대장성의 제2창고에서 처음 불이 난 것이다.] 7세기에 있었든 사건을 기록하면서 19세기에 사용하든 대장성(大藏省)이라는 관청이름을 기록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서기를 변조할 당시 종사하든 者이 실수를 한 것이나 아니면 변조한 시기를 알리기 위하여 삽입한 것이 아닌가 생각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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