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잘 하면서 논술을 잘 하지 못하는 까닭을 살펴봅니다.
요즈음
논술을 하려는 사람들은
여느 사람들과 많이 다르게
공부를 정말로 많이 해서
머리 든 것이 많은 사람들인데
머리에 든 것이 많은 사람들이
논술을 스스로 하지 못해서
논술을 따로 배우고 있고
이어서
논술을 배웠어도
걸음마를 하듯이
한 두 걸음씩 앞으로 내딛지 못해서
논술실력이 제자리에서 머물고 있는 까닭을 말하고자 합니다.
논술을 하려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나서
논술공부를 하려고 해야 하는데
그 두 가지 조건은
첫째로
공부점수가 65점을 넘어야 하고
둘째로
논설문을 60점을 넘게 쓸 수가 있어야 합니다.
현재
논술을 하려는 사람들은
첫째조건인
공부점수가 65점을 넘고 있으나
둘째조건인
논설문을 60점을 넘게 쓰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논술을 하려는 사람들이
첫째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고
이어서
둘째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증거는
바로
논술강의와 논술첨삭을 받아도
제자리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
논설문을
60점을 넘게 쓰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공부를 많이 했으면서도
논설문을 60점을 넘게 쓰지 못하는 까닭은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사교육으로 공부를 주로 했기에
공부한 지식이
스스로의 생각을 가꾸는데
살과 뼈로 어우러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교양책을 읽지 않아서
자신의 생각을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가다듬지 못해서
논설문을 잘 쓰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논설문을
60점을 넘게 쓰지 못한다고 해도
글쓴이가 보는 틀에서
논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논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논술을 하는 방법을 잘 가르쳐주면
논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논술을
60점을 넘게 쓸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논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논술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하기에
논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논술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논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논술을 하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까닭은
이들이
논술은
서론과 본론과 결론이란 논술흐름의
속흐름에서 흐르는
비타민적인 흐름이나 윤활유적인 흐름을
모르거나
아니면
알고 있어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쓴이가
논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얼핏 엿보는 바로는
논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논술흐름의 속흐름을 잘 모르기에
논술이론에 대하여는 이야기를 하겠지만
모범논술에 대하여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글쓴이가 생각하는 틀에서
모범논술이라고 여기는 논술로
두 개의 모범논술을
덧글로 달아놓겠는데
이 두 개의 모범논술은
대입논술 수험생이 써놓은 것입니다.
덧글:
두 편의 모범논술을 살펴보기!
글쓴이는
논술을 잘 하려면
세 다섯 개의 모범논술을 외워서
활용하고 응용할 수 있으면
논술을 잘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래와 같이
두 편의 논술을 옮겨놓고자 하니
잘 외워서 논술을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편의 모범논술은
글쓴이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대입논술 수험생이 써놓은 글인데
대입논술수험생이 써놓은 글을
글쓴이가 보는 잣대로 보면
틀림없는 모범논술이라고 보기에 옮겨놓는 것입니다.
논술연습을
백번을 하는 것보다
모범논술을
몇 개를 외우는 것이 낫고
모범논술을 읽고
논술연습을
열 번을 하는 것보다
논술첨삭을
한 두 번을 받는 것이 낫습니다.
1. 힘에 의한 진리왜곡을 풀 수 있는 열쇠
2. 개미
1. 힘에 의한 진리왜곡을 풀 수 있는 열쇠(우수상)
피타고라스가 직각 삼각형이 밑면의 제곱과 높이의 제곱의 합은 빗면의 제곱과 같다는 그의 정리를 발견했을 때 만약 빗면이 2일 경우에는 밑면과 높이는 무엇이 되느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당시 수학계의 권위자였던 피타고라스에게 그러한 의문은 피타고라스의 권위를 실추시킬 수 있는 문제였으며 따라서 피타고라스는 그러한 의문은 제기하는 제자들을 엄중하게 처벌하여 그들의 입을 막으려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진리를 왜곡하려 했던 것이다.
제시문에 제시된 상황도 이러한 권위에 의존한 진리의 왜곡이 여실히 보여지고 있다.
주인공 비비도는 바로 그러한 현실을 문제삼고 있으며 그 속에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러한 모순된 현실에 타협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것들은 관계없이 이단이라 규정하여 자신들의 힘을 빌어 그러한 자신들의 기준에 맞춘 이단자들을 폭력과 억압이라는 강제적 수단으로 규제하는 사제들과 그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명보존을 위해 쉽게 생각을 바꾸어 그들에게 장단을 맞추는 백성들을 비비도는 모두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한 몸 세우기에 급급하고 자신의 이익에만 골몰하는 현대인들 그들에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것에 반하면 그른 것이라는 규정할 뿐이다.
건설공사의 현장에서 감사원이 부실을 발견하고서도 권력과 연관된 지배층이 힘으로 그것을 무마하려하고 또 자신의 직업을 잃지 않기 위해 쉽게 그것에 동조하는 감사원도 현대 사회에서 힘의 의해 진리를 왜곡하는 한 사례라 볼 수 있으며 그러한 현상은 보수성과 무사안일주의의 단점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관료제 사회에서 더욱 흔한 현상이다.
이처럼 위선의 모습에 장단을 맞추고 그른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기반유지를 위해 그것을 숨기는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먼저 지배층의 개방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진리를 왜곡하는 일은 사회를 발전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사회를 퇴보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따라서 기존의 권력구조의 틀에서 벗어나 더 나은 이론이나 확실한 진리가 있다면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창의력을 낳게 할 수 있는 기본자세가 될 것이다. 이러한 개방자세는 학문하는 사람 그리고 정치가들에게 더욱 필요할 것이며 자신보다 타인을 생각할 줄 아는 자세를 배우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주체의식을 가져야 한다. 힘에 의해 자신의 의견을 쉽게 변경한다면 우리 사회는 힘에 의한 억지가 만연할 것이며 진리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에 대항하여 그 힘에도 굴하지 않고 지동설을 진리로 탄생시킨 갈릴레이의 자세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현대는 아직도 비비도가 살고 있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힘과 권력 또는 돈에 의해 쉽게 진리가 왜곡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진리라면 끝까지 그것을 관철할 수 있는 주체의식을 가져야 하며 또한 옳지 않은 일이라면 진리에 기꺼이 자리를 내줄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즉, 부끄럽지 않은 삶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삶만이 오늘날 힘에 의한 진리왜곡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가져온 곳 : 온고을 글터, 전주시립도서관, 2000년, 66~68쪽)
2. 개미
영화 ‘개미’에는 하나하나의 존재는 보잘것없지만 떼로 뭉치면 어떤 적이라도 거뜬히 물리치는 거대한 개미군단의 얘기가 나온다. 개미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선천적으로 정해진 각자의 임무를 당연시하며 충실히 수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범한 한 일개미가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나아가 그 개미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집단에 반항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위기에 부딪힌다.
이 개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것과 작은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 제시문 (1)은 큰 것의 폐해에 대해 말하고 있다. 큰 조직은 개미집단 내에 개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개인적 욕구를 묵살한다. 따라서 큰 조직에 속한 개인은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인간의 수단화 현상은 개인에게 소외감과 무력감을 안겨줄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3)에서는 이에 대한 대안인 ‘소집단’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큰 조직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관련되면서도 구체적으로 인식되기 힘들다. 큰 조직으로 인한 개인의 정신적 혼란은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대면접촉이 가능하며 우리가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인 소집단의 등장이 필요하다. 또한 소집단은 거대조직의 획일성을 극복하고 우리의 삶에 다양성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에 반해 (4)에서는 큰 것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큰 지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큰 그릇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지혜와 시간의 경우처럼 크면 클수록 좋은 것들도 있다.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한 여태까지의 논쟁과는 달리 (2)에서는 아예 큰 것과 작은 것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크기의 구분은 상대적인 것이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여러 전자제품의 크기는 점점 줄어드는 데 비해 기능은 갈수록 극대화되고 있다. 따라서 대상을 크기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크기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해서 우리가 큰 것과 작은 것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엔 우리의 삶을 구속하면서도 구체적인 실체는 알 수 없는 큰 집단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에 속하는 소집단이나 우리 개인 등 ‘작은 것’도 틀림없이 존재한다. 즉, (2)의 주장은 큰 것과 작은 것의 충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1), (3), (4)와 같이 둘 사이의 관계를 대립적으로만 파악하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의 신체라는 큰 단위를 구성하는 세포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실제 우리의 삶에서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큰 것과 작은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한 쪽이 존재해야 비로소 다른 쪽도 존재할 수 있다. 위의 개미의 경우에도 집단을 벗어남에 따라 집단 내에서 생활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많은 위험들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그러한 개미의 일탈이 지속된다면 전체 개미집단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은 어느 한 쪽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크기에 따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작은 것과 큰 것은 서로 보완해주면서 오순도순 서로 마주보며 정답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